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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빛 물고기. 고형렬
    책을읽다 2016. 11. 16. 11:29

      어느새 햇살이 비껴 다시 물그림자와 해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것들은 물속 모래바닥에 가닿기 전에 연어들의 작은 등을 자애롭게 비춰준다. 마치 해산과 종언을 앞둔 연어들에게 등을 쓰다듬어주는 관음의 손길이라도 느껴야 안심이 되는 그런 시간이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세월이 언제였을까? 아버지는 저 세상으로 떠나시고 나를 알아봤던 어른들은 계시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우리들의 시간과 사랑과 약속과 소멸, 그 아픔의 모든 기억들은 어디로 사라지고 만 것일까? 그것이 바로 미래이고 영원히 가닿을 수 없는 과거일까?(259~260)

     

      아득한 시간, 인간의 시간으로는 3년이지만, 그들에게는 긴 세월이다. 어떤 기억들은 너무나도 희미해져있다. 그들에겐, 치어 때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시간은 그들을 살신성인이 공간으로 데리고 가는 친구들이며 태양이다. 그 시간의 선은 끝이 닿은 두겹의 직선과 같아서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되돌아온다. 그들의 운명은 묘하게도 3년 만에 동해의 산을 찾아와서 알을 슬고 개울 속에서 눈을 감을 것이다. 그들이 돌아오는 동안 배는 더 불러졌고 뱃속의 알들은 아주 굵어졌다.(266)

     

      지구를 돌고 있는 달이 자신을 알지 못하듯이 연은 법처럼, 그 자체를 모른다. 생명들은 연으로 돌아가고 그 연에서 나온다. 그것을 법이라고 한다. 뜻이나 언어를 잃고 흘러가는 물과 같다. 설악산 계곡에서 물을 보면서 나는 그것들, 그러니까 생명이나 법이나 연 같은 그 무엇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266)


      연어회귀의 적은 해양, 하천오염, 낚시 등이다. 낚시에 걸리는 연어들은 주로 암컷들이다. 홀치기는 야만적인 낚시 법으로 절대적인 안정을 필요로 하는 산모에게 칼을 들이대어 몸과 마음에 상해를 입히는 것과 같다. 그루 치기는 연어뱃속의 알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준다. 낚시가 알을 가진 연어의 아랫배를 살짝 스치기만 해도 연어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상처를 입은 연어의 알은 수정 능력이 없다. 배를 갈라보면 알은 딱딱하게 녹색으로 굳어있다. 이런 연어는 놀란데다가 상처가 뱃속까지 닿았기 때문에 산란하지 못하는 불구, 석녀연어가 되고 만다. 낚시가 성행하게 되면 암컷이 부족하여 수정할 알이 모자랄 때도 있다. 그리고 컴컴한 바닷 속에 보이지 않게 우뚝 솟아있는 치망(덤장)은 아파트단지 만한 거대한 수중거미줄이다. 희귀 어들은 대부분 황금어장과 회유로의 길목에 쳐진 정치망에 잡힌다. 회귀율이 1.3퍼센트라고 하지만 사실은 2퍼센트가 넘으며 그 나머지 0.7퍼센트는 정치망 등에 잡혀 밀매된다고 한다.(280)

     

      어느 여름날저녁마당,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누이들과 식사를 하던 일, 정말 그런 날이 있었던가, 저녁 별들은 노을이 사그러지는 서산머리에서 저녁밥을 먹는 우리가족과 마당과 어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래서 사람들은 유년시절의 가장 좋은 동반이었던 아버지가 그립고 아버지가 되어있는 자신으로부터 멀어진 유년시절에 가슴 저미게 된다. 남아있는 것은, 자세히 보면 아무것도 없다. 연어의 아버지도 연어의 아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제상비상(諸相非常)일 것이다. * 제상비상: 모든 상은 상이 아니다. 은 현상이고 뒷은 실상이다. 그러나 아상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그 무상 뒤에 우리들의 아픈 생이 있다. 영원히 머무는 상은 그 어디에도 없다.(293)

     

      가을, 이는 지상으로 결실이 떨어지는 때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들이 헤어져야하는 때 이기도하다. 가을 하늘가로 피어나 길을 따라가고 있는 분홍과 하얀 코스모스가 이슬을 맞은 꽃잎을 달고 서서 아이들의 시선이 지나감을 알렸고, 누군가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간 그 작고 차거운 한천의 가을 끝 무렵을 보게 한다. 우주속의 지구근처의 하늘의 별자리가 바뀌고 나무들은 부름켜가 떨어져 나가고 잎들은 지고 산수는 갑자기 차가워지고 사람들에게 세월이라는 것이 흘러가는 것을 알리는 계절이 가을이다.(336)

     

      연어에게는 한 가지 불가해한 일이 있다. 연어는 모천에 들어오면 그때부터 어떠한 생명도 일체 건드리지 않는다. 즉 연어는 살생하지 않는다. 이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하천으로 들어오면서부터 그들은 일체의 먹이를 입에 대지 않는다. 오직 꿀만을 삼켜서 아가미 쪽으로 내 보낸다. 암 수가 똑같이 굶는다. 마치 먹는 일을 잊어버린 것처럼, 연어의 영물다운 면모는 바로 이점이다.(337)

     

      꽃같이 곱든 얼굴 검버섯은 웬일이며 옥같이 희든 살이 광대등걸 되었구나, 삼단같이 검은머리 불한당이 쳐갔으며, 볼따귀에 있든살이 마귀할미 꾸어갔나, 샛별같이 밝든눈이 반장님이 되어 있으며 거울같이 밝은귀가 절벽강산 되어가네.... 일사일생 공한 것을 어찌하여 면할 손가... 황천에 돌아간들 무엇가져 저항하리... 집을잃고 돌아간들 어디 가서 의지하리...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진다고 설어마라 명년삼월 봄이 오면 너는 다시 피련만은 우리인생 한번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백발가 중에서(조선후기 작자연대미상)(379)

     

       연어들의 생은 아름다운 산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남서쪽 멀리 황병산이 정선 땅에 솟아있다. 동부 쪽에 금강산이 솟았고 남대천 고향머리엔 태백산맥의 두봉 대청봉이 솟아있다. 그들은 아침마다 날이 밝으면 동쪽을 향해서 산머리를 바다로 들어올린다. 그 자태와 위용의 노래는 미래뿐만 아니라 과거와 오늘의 노래다. 청정한 정화력으로 우리들의 몸이 된 저 물의 세상을 굽어보는 설산들, 그 화려하고 세세한 산의 자연에서 그들은 왔을 것이다. 그들은 산 너머 갈 수 없는 수많은 계곡의 물줄기를 그리며 동쪽에서 알을 쓸 고 죽었을 것이다.

       공룡능선을 비롯하여 마등령, 저항령, 신선봉들 수많은 산봉들이 사방으로 거센 나뭇가지를 뻗고 신묘한 기암들은 하늘로 솟았다. 영서로는 대승령과 안산이 들어 숨고 동쪽으로는 화채봉에서 바닷가로 수많은 산봉들이 다리를 뻗었다. 설악산 봉우리 봉우리마다 머리위로 아름다운 꽃구름을 이어주고 사라져가는 세월이 보인다. 그 사라지는 세월과 구름이 아름답다. 사람들과 바다는 우리가 익히 짐작하는 죽음에 대한 아무런 두려움과 걱정이 없이 그 세월의 구름을 타고 어디론가 좋은 곳으로 떠나는 것 같다.

       서북하늘에 온정골폭포가 걸려있다. 그 아래 벼랑으로 독주폭포가 번득이고 그 아래 백암폭포 빙벽이 반짝이는 산령, 바다와 이어진 사랑의 탯줄들이다. 그것들은 다시 저 남쪽 구룡릉 아래 갈천약수 위에서 흔들거리며 미천과 서림천이 반갑게 몸과 마음을 섞고, 그리하여 우리들의 고향 모천은 낮게낮게, 하늘과 땅 사이를 영구히 흘러 갈 것이다. (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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