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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늙지 않는다. 현기영책을읽다 2016. 9. 14. 19:29
노년은 도둑처럼 슬그머니 갑자기 온다. 인생사를 통하여 노년처럼 뜻밖의 일은 없다. 아등바등 바삐 사느라 늙는 줄 몰랐다. 그래서 누구나 처음에는 자신의 몸속에 진행되는 늙음을 부정하고 거부하려한다. 늙음의 끝에 죽음이 있기 때문이고,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11쪽)
시간은 부단히 흘러가면서 잔인한 파괴력으로 모든 것을 허물고 마모해서 무화시킨다. 인간 역시 시간 앞에 굴절되고 변화하면서 노화의 과정을 거쳐 결국 인생을 마감한다. 시간의 흐름은 죽음의 행진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시간이란 거대한 지우개는 우리 뒤를 따라오면서 우리가 지나온 과거를 빈틈없이 지우고 있고 종국에는 우리의 존재 자체를 지상에서 지워버린다.(118쪽)
지나친 실용주의는 우리의 영혼을 피폐시킨다. 도시에 살더라도 자신의 내면에 축소된 자연을 늘 간직하고 있는 자는 그 영혼이 편안하다. 인간은 누구나 자연이 낳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몸과 마음속에 축소된 자연이 들어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도시인에겐 그것이 드러나지 않은 채 잠재되어있다. 그것이 바로 불안의 원인이다. 우리가 자연 속에 있으면 아늑한 행복감을 느껴지는데, 그것은 자연 속에 있어야 인간이 완전해진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안의 잠재된 자연을 일깨우기 위해 자주 바깥자연을 만날 필요가 있다. 예컨대 강둑에 홀로서서 서편하늘과 강물위에 붉게 번진 장엄한 낙조를 볼 때, 느닷없이 까닭 없이 눈물이 솟구치는 수가 있다. 아니, 그것은 까닭 없는 눈물이 아니다. 우리의 내면에 남아있던 자연의 조그만 흔적이 몸 밖의 대자연과 제대로 만나는 순간의 감동 때문이다. 뭔가 영혼의 한복판이 꿰뚫이는 듯한 통증과 함께, 내가 저 강물, 저 대자연의 어쩔 수 없는 일부로구나, 하는 자각이 눈물을 솟구치게 한 것이다.(126쪽)
할아버지는 주경야독의 시인이었다. 남들처럼 감물들인 갈옷차림으로 밭일 들일을 근실히 하면서도, 겨울 농한기에는 책을 읽고 한시를 썼다. 할아버지가 쓴 시를 나는 닷새에 한번 꼴로 다른 동네에 사는 강장의 어른에게 배달하는 심부름을 했는데 강장의 어른이 쓴 답 시는 그분의 손주가 배달해오곤 했다. 훗날 나는 그분이 남긴 한시의 묶음 속에서 피갈희옥(被鞨懷玉)이란 성구를 발견했다. “비록 갈옷을 입었지만 가슴에는 구슬을 품었다.”(163쪽)
아이 때나 지금이나, 나는 초원에 오면 무덤가에서 쉬기를 좋아한다. 아이시설엔 무덤의 잔디위에서 씨름도하고 뒹굴면서 놀았는데, 지금의 나는 몸속의 죽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그 잔디위에 몸을 눕혀본다. 나는 그 작은 공간의 잔디위에 깔려있는 평온한 침묵이 좋다. 나는 이미 흙으로 돌아가 없을 무덤의 주인을 생각한다. 평온한 침묵 속에 낮에는 햇빛이, 밤에는 별빛이 그 무덤을 지킬 것이다. 그래서 무덤가에서 죽음은 오히려 그 푹신한 잔디처럼 부드럽고 상냥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 느낌이 좋다. 독일민요에도 세상에서 가장 놀기 좋은 곳은 무덤가라고 했다.(236쪽)
노경에 접어들면서 나는 이전과는 좀다른 삶을 꿈꾸게 되었다. 노경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들이 적지 않는데, 그 중 제일 큰 것이 포기하는 즐거움이다. 이전 것들에 너무 아등바등 매달리지 않고 흔쾌히 포기해버리는 것, 욕망의 크기를 대폭 줄이는 것이다. 포기하는 대신 얻는 것은 자유이다. 그 자유가 내 몸과 정신을 정갈하고 투명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그래서 전보다 오히려 젊어진 듯 한 느낌마저 든다. 얼굴은 주름 잡혔지만 심장만은 주름살이 생기지 않는 그러한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것이다. 허리를 굽혀 앉은뱅이 노랑 제비꽃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자유, 드넓은 초원에 가슴을 맞댈 수 있는 자유를 꿈꾼다. 욕망의 갖가지 소음들이 저만큼 물러난 지금 나는 호젓한 정적 속에 놓여있다. 그 정적이 나는 좋다. 다른 삶을 위해 다시 태어난 듯하다.(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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