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면을 끓이며. 김훈책을읽다 2016. 7. 26. 07:05
자연은 그윽하거나 유현하지 않다. 자연은 저 자신의 볼 일로 가득차서 늘 바쁘고 인간에게 냉정하다. 자연은 인간에게 적대적이거나 우호적이지 않지만 인간은 우호적이지 않은 자연을 적대적으로 느낀다. ‘무위’는 자연의 본질을 말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손댈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열대의 밀림은 가르쳐 주었다.(80쪽)
행복에 대한 추억은 별 것 없다. 다만 나날들이 무사하기를 빈다. 무사한 날들이 쌓여서 행복이 되든지 불행이 되든지, 그저 하루하루가 별 탈 없기를 바란다. 순하게 세월이 흘러서 또 그렇게 순하게 세월이 끝나기를 바란다. 삶은 살아있는 동안만의 삶일 뿐이다. 죽어서 소멸하는 사랑과 열정이 어째서 살아있는 동안의 삶을 들볶아 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사랑과 열정으로 더불어 하루하루가 무사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은 아니지만, 그래도 복 받은 일이다.(137~138)
한국국민들은 오랜 세월동안 정치권력에 속아왔다. 불신은 사람들의 정치정서 속에서 허무주의로 자리 잡았고, 그 허무주의는 일상화된 惡이 서식하는 토양이 되었다. 세월호 참사는 난데없이 들이닥친 재앙이 아니라, 그 일상화 된 惡의 폭발인 것이다. 우리는 고통을 분담함으로써 시대의 난제를 극복해본 역사적 경험이 전무 하거나 매우 빈곤하다. 고통은 늘 고통을 당하는 계층에게 전가되었고 기회와 정보와 우월적 지위는 늘 강하고 러키한 Lucky 자들의 몫이었다. 이 불신과 고통분담에 대한 역사적 경험의 빈곤이 당면한 문제의 해결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는데, 정부가 제시한 이 무력하고 자기방어적인 ‘시행령’은 갈등과 불신에 기름을 부어서 불을 붙이는 꼴이다.(174)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들을 향하여 나는 오랫동안 중언부언하였다. 나는 쓸 수 없는것들을 쓸 수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헛된 것들을 지껄였다. 간절해서 쓴 것들도 모두 시간에 쏠려서 바래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늘 말밖에 있었다. 지극한 말은, 말의 굴레를 벗어난 곳에서 태어나는 것이리라.
이제, 함부로 내보낸 말과 글을 뉘우치는 일을 여생의 과업으로 삼되, 뉘우쳐도 돌이킬수는 없으니 슬프고 누추하다. 나는 사물과 직접 마주 대하려한다. (410)
작가가 그 동안의 절판된 산문집들 중에 고르고 새 글을 더하여 펴낸 책이다. 라면을 매년 36억 개 일인당 74.1개를 먹으며 살아가는 우리나라 보통사람들의 고단한 삶의 애환을 그린 책의 표제 ‘라면을 끓이며’를 시작으로 밥. 돈. 몸. 길. 글. 다섯 꼭지로 나누어 쓴 산문집이다. 고향인 한양도성안 북촌에서 지금 살고 있는 일산에 이르기 까지 성장과정과 친지 이웃 등에 관한 긴 세월의 이야기이지만 엊그제의 일을 보는 듯 새롭게 읽혀진다.
‘현의 노래’ ‘칼의 노래’ ‘남한산성’ ‘풍경과 상처’ ‘공무도하’ ‘자전거 여행’... 저자의 책 여러 편을 읽었지만 그의 글은 늘 한편의 잔잔한 그림을 보는 것 같다. 그림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리며 오랫동안 떠날 줄 모르는 관람객처럼 내처 앞으로 나가고 싶지 않아 몇 번이고 되돌아가 머물고 또 머물게 된다. 그것이 김훈이라는 작가의 필력이 주는 끌림이다.
도시의 지겨움을 버리고 훌쩍 바닷가로 떠나는 자유, 현실이 고단하면 잠시 동안 지금의 공간을 떠나보는 여유는 생각하기는 쉽지만 막상 저지르기는 쉽지가 않다. 책 속에서 동해와 서해로 떠나 그곳 사람들의 삶속에 구성원이 되어 인생을 즐기고 관조하는 모습이 참 부럽다.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겠지만 책을 만든 출판사의 마케팅 전략으로(전략이라 할 것도 없이 찌질하지만) 예약구매자에게 라면 1개와 냄비를 주는 이벤트로 물의를 일으킨 일은 작가의 이미지를 흐리게 하였다. 그런 시시한 일에 동의했을 리야 없겠지만 작가의 치열한 글이 주는 모습과는 매치가 되지 않는다. 지난 산문집에서 엄선하고 새로운 글을 더하여 낸 책이 글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갑자기 가벼워 보이고 장삿속 구차함이 비쳐져 헛웃음이 난다.
처음 책 표제 '라면을 끓이며' 를 보고는, 언듯 그 동안의 책 제목에 비추어 어색한 느낌이 들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허접한 판촉 이벤트를 위한 것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도 든다(아무래도 책 제목에 맞춘 출판사 마케팅이겠지만). 누구든 잔머리 굴리면 한방에 훅 간다는 진리를 가벼히 여겨서는 안될 일이다. 결국 도서정가제 위반 판정을 받았다. 저자의 명성에 기대어 양은냄비 하나에 독자의 눈을 혹하게 하려는 얄팍한 상술, 그것도 내노라하는 메이저급 출판사에서 말이다. 어찌되었던 작가에게는 두고두고 지워지지 않는 흠집이 되지 않을까 싶어 작가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안타까운 맘이다.
'책을읽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 박수용 (0) 2016.07.30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 (0) 2016.07.27 헌법의 풍경. 김두식 (0) 2016.07.19 시선. 정운영 선집. 정운영 (0) 2016.07.18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 우치다 타츠루 (0) 2016.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