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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 우치다 타츠루책을읽다 2016. 7. 15. 16:38
나는 강해지기 위해 합기도에 입문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 자신의 ‘약함이 초래하는 재앙’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입문했습니다.(72쪽)
보통은‘어떻게 나를 강하게 만들 것인가’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생각하는데, 나는 거꾸로 ‘왜 이토록 약 한가’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생각했던 것이지요.(84쪽)
어느 철학자에 의하면, 무지란 지식의 결핍이 아니라 지식으로 머리가 빼곡하게 채워져 새로운 지식을 더 이상 받아들일 여지가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합니다.(85쪽)
인간은 잘 몰라서 무지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세상사를 잘 알고 있어도 지금 자신이 채용한 정보처리 시스템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몸소 나서서 무지해집니다. 자신의 지적 틀을 바꾸도록 요구해 오는 정보의 입력을 거부하는 아집이 바로 무지라 불리는 것이지요.(87쪽)
“그렇다면 묻겠다. 당신들은 이제까지 어떤 신을 믿어 왔는가? 선행하는 자에게 상을 주고, 악행을 하는 자에게는 벌을 내리는 ‘권선징악의 신’인가? 그렇다면 당신들이 믿고 있었던 것은 ‘유아의 신’이다.
권선징악의 신이 완전히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선행은 상을 받고, 악한 일은 곧 처벌받을 것이다. 그러나 신이 모든 인간사에 기적적으로 개입하는 세계에서 인간은 달성해야 할 어떠한 것도 없어진다.
비록 눈앞에서 악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도 우리는 팔짱을 낀 채 신이 개입하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비록 눈앞에서 어떤 악한일이 벌어지고 있어도 우리는 팔짱만 낀 채 신이 개입하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신이 모든 것을 대행해 주기에 우리는 부정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있어도 꺼림칙하게 생각하지 않고 약자를 도울 의무도 면제받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신의 일이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그처럼 인간을 영원히 유아인 채로 머물게 하는 신을 갈구하고 믿고 있었던 것인가?”<레비나스>(166쪽)
악을 근절하려는 지나친 정의감을 가진 사람은 인간의 유약함이나 어리석음에 대하여 필요 이상으로 무자비합니다. 반대로, 자애가 지나친 사람이 잔악한 인간을 무원칙적으로 용서해 버린다면 사회 질서는 비걱거리며 흔들리게 되지요. 사회가 충분히 정의로우면서도 온화한 감촉을 갖기 위해서는 인간의 살아있는 몸뚱이가 필요한 것이지요. 정의가 과도하게 공격적이 되지 않도록, 자애가 지나치게 방탕하지 않도록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건 오직 살아있는 육신의 인간뿐입니다,(179쪽)
1950년 도쿄에서 태어난 저자는 문학, 철학, 정치, 문화, 교육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면서 50여권의 저서를 통하여 폭넓고 깊이 있는 지성을 보여주는 일본의 대표적 진보사상가이며 교육가, 문화평론가이다. 소싯적부터 지금까지 합기도로 몸을 다스려 절제된 몸에서 나오는 맑은 정신에서 에너지를 찾는다. 지금은 ‘개풍관(凱風館)’이라는 합기도 도장을 1층에 열고 2층에서 생활을 하며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절제가 겸손으로 이어진 삶 속에서 자신의 철학을 찾고 철저하게 실천하는 지성으로 그의 저서 여러 권이 번역되어 한국의 독서인들과도 친숙하다.
강해지기 위하여 합기도에 입문한 것이 아니라 약함이 초래하는 재앙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겠는가? 강자가 되어 거기서 생산되는 소위 권력을 움켜쥐고 군림하려 함이 아니라, 무지함에서 오는 어리석음의 환란을 맞지 않겠다는 修身의 뜻일 것이다. 다시말해서 삶의 有備無患이라는 지혜를 찾기 위함으로 읽힌다. 저자의 책은 절제된 실제의 삶에서 체득되고 그 바탕위에 차근차근 쌓아올린 공부여서, 읽을 때마다 텅 비어있는 공간이지만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한, 깊은 산골 정갈한 사찰에 들어선 느낌으로 다가와, 저절로 자세를 가다듬게 되는 청량한 讀書感을 안겨준다.
어찌 노래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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