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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한강 장편소설책을읽다 2016. 7. 4. 21:22
내 몸은 다른 몸들과 함께 묵묵히 흔들리며 트럭에 실려갔어. 피를 너무 쏟아내 심장이 멈췄고, 심장이 멈춘 뒤로도 계속 피를 쏟아낸 내 얼굴은 습자지같이 얇고 투명했어. 눈을 감은 내 얼굴을 본 건 처음이라 더 낯설게 보였어. (47쪽)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치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95쪽)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태극기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주겠다. (119쪽)
날은 받아 유족들이 다 같이 이장을 했는데 관들을 열어보니 처참했던 모습 그대로인 겁니다. 유골에 비닐이 친친 둘러져 있고 피묻은 태극기가 덮이고.... 동호는 그래도 처음에 가족이 수습했기 때문에 유골이 얌전했습니다. 우린 무명천을 한마 끊어가서, 누구에게도 맡기기 싫어 뼈 한마디 한마디를 직접 닦았어요. 어머니가 머리 부분을 맡으면 충격이 크실까봐, 내가 얼른 집어서 이빨 하나 하나까지 정성껏 닦아줬습니다. 그랬어도 그 일을 이기기가 힘드셨던가봅니다. 그때 내가 우겨서 집에 계시게 했어야 했는데. (214쪽)
나는 가방을 열었다. 가지고 온 초들을 소년들의 무덤 앞에 차례로 놓았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쪼그려앉아 불을 붙였다. 기도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묵념하지도 않았다. 초들은 느리게 탔다. 소리없이 일렁이며 주황빛 불꽃 속으로 빨려들어 차츰 우묵해졌다. 한쪽 발목이 차가워진 것을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의 무덤 앞에 쌓인 눈 더미 속을 여태 디디고 있었던 것이다. (215쪽)
세계3대 문학상이라 하는 맨부커 상을 수상하였다는 바람에 '채식주의자'를 읽기 전까진 작가를 몰랐다. 소설을 잘 읽지 않는 편이기도 하지만 박경리나 조정래 김주영 김 훈 황석영 이문구 최인호 신경숙 등 이른바 원로 작가들의 작품은 간간 읽었지만 나 보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잘 읽지 않았다. 이 작품이 나의 독서편식을 일깨워주었다. 신진 작가들의 작품도 많이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맨부커상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독서인들에게 호기심을 발현케 하는데 문학상의 영향은 크다.
생명만큼 소중한 게 있을까? 내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어찌 했을까? 상상하기조차 버겁다. 80년5월18일 이른바 광주사태라 호도했던 처절한 광주의 유린을, 사라진 친구를 찾으려는 중학생 동호를 중심으로 당시의 참혹한 학살의 현장을 단단한 고증과 취재로 쓴, 마치 작가가 비추는 카메라를 따라 다니며 보는 듯, 과거가 아니라 방금 그 곳에서 일어난 듯, 현실감이 뚜렷한 작품이다. 눈을 뜨고 볼 수가 없다. 귀를 열고 들을 수가 없다. 분노와 함께 소름이 돋고 그 소름이 가시가 되어 폐부를 찌른다. 다 읽을 때까지 책이 놓아지지 않는다. 이 정권은 삼십년이 지난 지금도 ‘님을 위한 행진곡 제창’ 조차도 포용하지 못하는 옹졸함이 측은하고 안타깝다.
진실이 무엇인지 속지 않으려면, 그래서 이 땅의 민주주의가 더 이상 뒷걸음치지 못하게 하려면, 읽고 또 읽어야 함을 다시한번 일깨워 준 작품이다. 5.18 가족의 고통을, 제 때 몰랐던, 그래서 아무런 짓도 못했던, 알았어도 무기력 했을, 미안함과, 진심으로 아픔을 나누고 싶다. 그것의 첫번째는 잊지 않는것에서 시작해야 할것이다. 채식주의자를 읽었을 때도 그랬지만 이 작품을 통해서도 3대 문학상이라는 맨부커 상의 권위를 짐작케 할 만큼 작가의 필력은 깊고 넓어서 울림이 크다. 아버지 한승원 작가가 애비를 넘어선 기특한 딸이라며 흐뭇해 하는 모습이 참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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